한국형 中企 새 모델 ‘스몰 자이언츠’
이제는 ‘작은 것’이 ‘큰 것’ 강소기업이 경제의 ‘허리’
2010년 10월 05일 14시 28분
‘신기술’로 글로벌 경쟁력… 성장률 2배, 특허건수 8배, 수출비중 5배로
혁신성 취약한 중견기업 약점 보완 ‘히든챔피언’… 해외에서 먼저 인정
드라마 ‘자이언트’가 인기다. 배경은 1970~80년대. ‘아파트 신화’의 거점 강남 개발사를 조명한 시대극이다. 드라마에서 주인공은 온갖 역경을 딛고 굴지의 건설업체를 일궈나간다. 그 기반이 된 건 ‘시멘트 경화법’이란 신기술이었다. 또 주인공이 업계의 자이언트(Giant·거인)로 성장할 수 있었던 자양분은 성공을 향한 열정과 노력, 도전과 개척정신이었다.
현실로 돌아와 보자. 2010년 9월 현재. 우리나라엔 작지만 강한 기업 ‘스몰 자이언츠(Small Giants)’들이 있다. 이들도 진짜 ‘자이언트’를 향해 도전하고 있다. 물론 열정과 패기, 개척정신으로 완전 무장했다. 창업 당시부터 확고한 기술과 비전, 마케팅을 기반으로 국내 시장을 장악했다. 또는 ‘무’에서 ‘유’를 창출하는 ‘마법’도 부렸다. 기존에 존재하지 않은 융합분야의 신(新) 시장을 개척해 차별화된 경쟁력을 확보하기도 했다.
때론 국내 시장이 좁게 느껴졌다. 해외 시장 1위 목표도 마다하지 않았다. 글로벌 틈새시장을 개척해서 선두를 점했다. 21세기형 마케팅의 선구자 세스 고딘은 “이제는 작은 것이 큰 것이다(Small is the new big)”라고 외쳤다. <이코노믹 리뷰>는 스몰 자이언츠의 성공 사례와 발전 과제에 대해 짚어봤다.
인천시 남동구에 위치한 에이스테크놀로지 본사 전경.
‘구구팔팔(9988)’. 한국 경제에서 중소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을 설명할 때 단골로 등장하는 용어다. 우리나라 중소기업은 전체 사업체 수의 99%, 고용의 88%를 담당하고 있어서다(2008년 말 기준).
그러나 이러한 양적 팽창에 비해, 질적인 성장은 많이 부진하다는 평가다. 대기업 위주의 산업정책으로 대·중소기업 간 구조적 양극화는 이미 심각한 수준이다. ‘정부 주도’의 중소기업 육성책도 이젠 경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빠르게 변화하는 경영 환경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중소기업도 자생력을 갖춰야 한다는 논리다.
더구나 국내 시장에선 더욱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인구 감소로 내수 시장이 위축되고, 저출산·고령화로 인력난이 심화되면서부터다. 반면 해외 시장은 교역 규모가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중국·러시아·인도 등 신흥개발국의 고속 성장도 기회 요인이다. 해외 시장 진출로 성공 모델을 만들자는 논의가 활발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스몰 자이언츠는 기술, 비전, 마케팅 등을 원동력으로 성장해왔다. 중소기업에게 기술력은 생존을 좌우할 정도다. 중소기업 업계 작은 거인들에게도 ‘기술’이 지속가능 경영의 힘이었다.
무선통신장비 전문회사 에이스테크놀로지는 해외에서 더 많은 매출을 올리는 IT 강소기업이다. 지난해 총 매출은 1628억 원. 이 중 해외에서만 90% 이상을 벌여 들였다.
국내 이동통신 시장은 협소하다고 판단, 일찍이 해외 시장에 진출해 우수한 글로벌 네트워크를 확보했다. AT&T, 에릭슨, 노키아 시멘스 네트웍스 등 세계적인 이동통신 업체들을 주요 거래선으로 개척한 것.
일류 통신 기업들과 지속적인 거래를 이루기 위해 으뜸 자산으로 삼은 것은 글로벌 눈높이에 맞는 기술 서비스였다. 우선 연구소의 기술인력과 연구설비를 선진화시켰다. R&D 투자도 공격적으로 감행했다. 현재 에이스테크놀로지의 연구인력은 전체 구성원의 30%에 달하며 매년 매출 대비 약 9%를 연구개발비로 투자하고 있다. 보유하고 있는 지적재산권만도 289건에 달한다.
지속가능 경영의 일등공신은 ‘신기술’
에이스테크놀로지의 TD-LTE 전세계 네트워크용 RRH 모델.
또 올 초 선진 기술력 확보를 위해 영국의 Axis와 WTL 등 두 기업을 인수했다. Axis는 RRH(Remote Radio Head) 분야에서 원천기술과 특화된 노하우를 인정받고 있는 강소기업. 차세대 소형 기지국 장비 RRH는 최근 스마트폰 대중화로 3G와 4G 이동통신 시장이 열리면서 크게 주목받고 있다.
WTL은 무선통신 안테나 및 전파분야의 혁신기술을 선도하는 구(舊) 노텔의 통신기술연구소다. 이번 인수로 WTL의 선행기술을 담당하던 연구인력이 합류하여 에이스테크놀로지는 한층 강화된 R&D 역량을 확보하게 되었다.
세계 유수의 기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던 데에는 지속적인 인프라 투자도 한몫 했다. 5개의 중국 현지공장과 인도 제조공장을 설립해 글로벌 수직계열화 생산체제를 구축했으며 미국과 유럽 등에 Hub(물류거점)를 운용하고 있다.
‘리필 잉크’의 대명사 잉크테크 역시 그렇다. 97년 외환 위기 이후 비싼 정품 대신 저렴한 리필 잉크가 인기를 끌면서 회사는 성장가도를 달렸다. 그러나 중국의 저가제품이 몰려오면서 경쟁력을 잃게 됐고, 카이스트 화학과 박사 출신 정광춘 대표는 다시금 연구개발에 고삐를 바짝 죄었다. 노력 끝의 결실은 달콤했다.
2005년 세계 최초로 첨단 나노기술을 활용, 은(銀)을 완전히 녹인 형태의 투명 전자잉크 개발에 성공했다. 이 잉크가 인쇄회로기판(PCB), LCD 반사필름, 전자태그(RFID) 등에 널리 활용되면서 이젠 차세대 IT 소재 부품기업으로 주목받고 있다.
모험과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고 ‘비전’과 ‘철학’을 원동력으로 성장한 ‘건설형’도 주목할 만하다. 환경 관련 산업소재 전문기업 에코프로는 모두들 몸을 사리던 IMF 시절,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갔다. 이동채 대표는 1997년 교토의정서 채택을 계기로 환경산업에 눈을 떴다. 차세대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급부상하리란 선견지명이었다.
이후 ‘회계사’라는 안정된 직업을 버리고 온실가스 제거용 기능성 흡착제와 환경촉매를 잇달아 개발해 틈새시장을 개척했다. 환경오염의 위험을 해소할 수 있는 대체에너지(2차전지 핵심소재) 사업으로도 영역을 넓혔다.
이 회사는 국내에선 아직까지 2차전지 소재의 국산화가 더딘 가운데, 핵심소재인 다성분계 전구체 수요의 약 30%를 담당하고 있다. 7년 간의 개발 끝에 일본 수준의 규모와 기술력을 갖추는 데 성공했다.
비전·철학·마케팅도 글로벌화 동력
오스템 임플란트 생산본부 내부 전경.
2007년부터 제일모직의 사업권 일체를 인수, 삼성SDI에 2차전지의 양극을 만들어 공급하는 역할도 맡고 있다. 에코프로는 국내 유일의 전구체 생산업체로서, ‘세계 시장 선점 10대 핵심소재(WPM) 사업자’로 선정된 바 있다.
마케팅 기술도 스몰 자이언츠의 숨은 경쟁력이다. 온열치료기 등 의료기기 전문업체 ‘누가의료기’는 글로벌 마케팅 강자로 성공한 대표적인 강소기업이다. 전 세계 60개국 이상에 온열의료기를 수출하고 있는 누가의료기는 국내에서보다 해외에서 더 잘 알려져 있다. 2002년 설립돼 2008년 수출 1억 달러를 달성하는 성과를 거뒀다.
해외시장 개척에 발판이 된 것은 기술력과 함께 현장 체험 마케팅이었다. 누가의료기는 현재 미국, 러시아, 중국 등 전 세계 2000여 곳에 체험 홍보관을 설치, 운영하고 있다. 조승현 회장은 의료기는 몸에 직접 닿는 제품이므로 사용자가 체험해보고 구매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초고가 의료기인 만큼 그 가치를 몸소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판단이었다. 이런 체험 마케팅으로 중국 시장에서 가정용 의료기기 파워 1위 브랜드로 인정받고 있다.
전문가들은 한국이 세계 시장에서 탄탄한 강자가 되려면 강한 중소기업의 육성이 절실하다고 입을 모은다. ‘스몰 자이언츠’의 개념을 정의한 이장우 중소기업학회장(경북대 경영학부 교수)는 “스몰 자이언츠들은 매출의 절반 이상을 수출로 채우는 등 강력한 글로벌 동인을 가지고 있다”며 “이들은 내수시장에 집착하면서 혁신성과 도전정신이 취약한 기존 중견기업들의 약점을 보완할 수 있는 미래형 기업이다”라고 강조했다.
또한 그는 “21세기 한국 경제의 핵심 주체는 스몰 자이언츠 기업군이 될 것으로 전망되는 만큼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며 스몰 자이언츠 기업들의 성장 패턴 DB 구축과 경영지원, 소생태계 활성화 지원, 불공정거래 개선 등 국내시장 생태계 복원 등을 정책대안으로 제시했다.
미래 한국 책임질 핵심 주체로 키워야
김기문 중소기업중앙회 회장 역시 “향후 10년은 국내시장 규모 축소와 해외시장 확대가 이루어지면서 ‘시장과 판로’가 중소기업 경영의 핵심으로 부상할 것으로 보인다”며 “중소기업의 경영 비전도 협소한 국내시장에서의 강소기업이 아닌 글로벌시장에서의 ‘스몰 자이언츠’를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스몰 자이언츠는 독립성, 과감성, 도전성, 가치성을 갖춘 중소기업으로서, 이들 중소기업은 독일의 ‘히든챔피언’과 같이 글로벌화를 지향하고, 한국의 ‘스피드경영’을 경영 수단으로 활용해 한국 경제의 허리를 담당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스몰 자이언츠’란 작지만 강한 기업
중소기업중앙회·중소기업연구원·중소기업학회가 지난 6월 제주도에서 열린 ‘중기 리더스 포럼’에서 앞으로 10년을 주도할 한국형 중소기업의 성공 모델로 제안한 개념이다. 이장우 중소기업학회장은 ‘스몰 자이언츠’를 “작지만 국내외 시장에서 지속가능한 경쟁력을 보유한 기업”이라고 정의한다.
이들 기업은 종업원 300명 미만 또는 자본금 80억원 미만의 기업으로서 국내시장에서 1위를 하거나 해당분야 세계시장에서 5위 이내의 시장지배력을 가졌다. 성장률과 이익률이 일반 중소기업 대비 2배 이상 높으며, 일반 벤처기업과 비교했을 때 매출액 대비 수출비중은 5배, 특허건수도 8배 가량 많은 것이 공통된 특징이다.
성공 요인인 기술, 비전, 마케팅을 기준으로 기술개척자형, 장인형, 건설가형, 마케팅형 등 크게 4가지 성공유형으로 구분된다.
전민정 기자 puri21@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