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반성장에 대한 논의만 나오면 ‘부도덕한 갑(甲)’으로 몰리는 대기업도 고충이 만만치 않다. 대기업들은 2000년대 이후 동반성장을 위해 ‘할 만큼 했다’고 주장한다. 실제 대기업과 1차 협력업체 간의 관계는 상당히 개선됐다. 하지만 최근 정부가 일방적으로 동반성장을 강요하다 보니 오히려 대기업이 협력업체로부터 부당한 일을 당하고, 동반성장 관련 조사나 행사에 시달려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라는 불만도 터져 나오고 있다.
동아일보가 10대 그룹 핵심 계열사의 동반성장 담당 실무자들을 대상으로 대기업의 고충 및 바람직한 동반성장 방향을 조사한 결과 충격적인 사례도 적지 않았다. 일부는 협력업체로부터 무고에 가까운 협박을 당해 소송에 휘말린 경우도 있었다. 한 제조업종 담당자는 “일부 협력업체는 우리가 전혀 기술을 탈취하지 않았는데도 청와대나 공정거래위원회에 투서를 하겠다고 협박했다. 요즘 같은 상황에서 이런 문제가 불거지면 대기업이 뒤집어쓰는 형국이라서 억울하지만 돈으로 무마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다른 제조업종 관계자는 “한 협력업체가 횡령을 저지른 사실이 드러나 거래 중단을 요구했더니 오히려 이 업체가 ‘힘없는 중소기업이 당한다’며 소송을 걸고, 인터넷 언론에 제보를 하는 등 무고 행각을 벌이고 있다. 동반성장을 활성화하자는 움직임을 악용하는 경우라 안타깝다”고 말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협력업체의 하자나 불량까지도 묵인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기도 한다. A기업 관계자는 “부품 불량률이 매우 높은 협력사에 신규 증가물량을 배정하지 않았더니 당장 ‘투서를 하겠다’는 협박이 돌아와서 물량의 20%를 주는 선에서 무마를 할 수밖에 없었다”면서 “협력업체의 경쟁력도 거래에 반영해야 하는데 예전 같으면 퇴출 대상이었을 중소기업이 ‘철밥통’이 되는 곳이 있다”고 털어놨다.
정부 부처 및 산하기관이 경쟁적으로 ‘동반성장 실적 만들기’에 혈안이 되는 바람에 유사한 설문조사나 자료 요청, 행사 등을 처리하느라 정작 동반성장을 위한 업무를 할 틈이 없다는 하소연도 많다. B그룹 관계자는 “동반성장위원회는 물론이고 지식경제부, 공정위, 심지어 국가정보원에서까지 동시다발적으로 동반성장 조사를 하는 바람에 동시에 7곳에 내용은 같은데 양식이 다른 자료를 만들어 보낸 적이 있다”고 한숨을 쉬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중소기업에서도 정부의 이벤트성 행사 때문에 잡무가 많다고 호소할 지경이다. 특히 여러 대기업과 거래하는 우량업체들은 각종 간담회나 협의회에 불려 다니느라 정신이 없다더라”라고 말했다.
대기업의 노력에 중소기업이 부응하지 못한다는 아쉬움도 있었다. 한 설비업종 담당자는 “협력업체를 위한 컨설팅 등 경영지원 프로그램을 선진국 수준으로 만들어 놨는데 일부 협력업체는 ‘자사 정보가 노출된다’면서 참여를 거부했다. 그러면 대기업도 돈과 시간이 드는 노력을 하기보다는 ‘대금이나 제때 주면 되지’라고 포기하게 된다”면서 “중소기업들도 오픈 마인드를 갖고 적극적으로 뛰어야 한다”고 말했다.
○ 약발없는 정책 왜?
“정부도 그동안 나름대로 애썼다. 하지만 늘 방향이 문제였다.”
정부의 중소기업 정책성과를 묻는 질문에 한 중소기업 전문가는 이렇게 말했다. 1965년부터 나온 중소기업 제품 공공구매제부터 1979년 중소기업 고유업종제 등에 이르기까지 정부는 다양한 중소기업 육성정책을 내놨다. 현 정부 들어 기술탈취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제와 대기업 일감 몰아주기 규제와 같은 동반성장 정책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 냉랭하다. 대기업의 ‘단가 후려치기’와 ‘인력 빼가기’는 여전하다. 평행선을 달리는 우리나라 대·중소기업 관계에서 중재자 역할을 자처한 정부 정책에도 한계가 있었던 셈이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역대 정부가 진입규제 위주의 중소기업 보호정책에만 신경을 썼을 뿐 기술 개발과 해외 진출 등 근본적인 기업 경쟁력 향상에 상대적으로 등한히 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예컨대 대기업의 무분별한 문어발식 확장을 막기 위해 정부가 1979년 3월 도입한 중소기업 고유업종제는 대기업 진입을 막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소규모 영세기업 난립으로 2006년 말 폐지됐다. 중소기업청장이 고시한 물품을 공공기관이 수의계약을 통해 우선 구매하는 ‘중소기업 제품 공공구매제’ 역시 중소기업들의 판로를 개척해준 측면도 있었지만 관련 중기들의 경쟁력을 떨어뜨렸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이와 함께 중소기업에 대한 납품대금 지급일(60일 이내)을 규정한 하도급법은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끼인 중견기업에 오히려 부담을 안겨줬다는 분석도 있다. 이 때문에 성장한 중견기업들이 자회사를 세워 오히려 중소기업 규모에 머무르는 이른바 ‘기업 쪼개기’에 나서는 폐해를 낳았다.
○ 못살겠다는 ‘乙’ 중소기업
“납품업체 후려치는 먹이사슬은 여전합니다. 기초 자재라서 하청 중의 하청인 콘크리트 블록은 개당 가격이 장당 60원인데, 대기업에서 1차 협력사에 55원에 발주해요. 그럼 1차 협력사도 남는 게 있어야 한다며 5원 낮추고, 다음 협력사가 또 5원 낮추고…. 그럼 우리는 45원에 납품하는 겁니다. 고작 15원 차이라고요? 가격의 25%가 내려간 거예요.”
산업계의 동반성장 실태를 묻는 질문에 콘크리트연합회 김경식 이사장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는 “정부와 대기업이 동반성장을 열심히 외친다지만 현장에서는 체감하지 못하겠다”며 “하청의 먹이사슬이 이 지경인데 중소기업이 과연 살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설문조사에 응한 36명의 하도급 관련 협동조합 조합장 및 임원들은 동반성장에 대해 대부분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한 조합장은 “정부와 언론에서 눈을 치켜뜨니 대기업들이 그나마 불공정거래 관행을 과거보다 줄이고 있다”면서도 “문제는 언제 다시 과거로 돌아갈지 모르기 때문에 제도적으로 불공정거래 관행을 바로잡는 시스템이 구축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들은 가장 불공정한 관행으로 ‘불합리한 납품단가 인하 요구’(83.3%)를 꼽았다. 주물조합 서병문 이사장은 “납품단가만 제대로 받으면 직원들 임금도 올릴 수 있으니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임금 격차를 줄일 수 있고, 연구개발(R&D)에도 숨통이 트인다”며 “가격만 제대로 쳐주면 동반성장하자고 목소리 높일 필요도 없다”고 말했다.
일부 조합장은 대기업-중소기업 관계보다 1차 협력사-2, 3차 협력사의 관계가 더 심각하다는 지적이 많았다. 공구조합 최용식 이사장은 “대기업들은 ‘우리는 정말 잘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하는데, 사실 그런 면이 있다. 어음만 봐도 요새 대기업들은 어음 대신 모두 현금 결제한다”며 “문제는 1차 협력사가 대기업에서 받은 만큼 똑같이 2, 3차 협력사에 해줘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철강 관련 한 조합장은 “대기업이 나서서 1차 협력사가 2, 3차 협력사를 잘 대해 주는지 실태 조사에 나서는 추세”라면서도 “문제는 꼭 1차 협력사 관계자를 대동하고 공장을 찾으니 2, 3차 협력사 처지에서는 현실은 지옥 같아도 ‘잘 지내고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대기업의 문어발식 확장으로 인한 중소기업 업종 진출과 대기업 소모성 자재 구매대행(MRO) 계열사에 대한 원망의 목소리도 높았다. 사무용품 관련 조합의 한 이사장은 “당장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기업 MRO 가운데는 1년도 아니고 3개월에 한 번씩, 분기마다 납품 가격을 30% 후려치는 곳도 있었다”고 전했다.
정부를 중심으로 동반성장에 대한 감시가 심해지니 과거와 다른 양상이 빚어지고 있다는 설명도 이어졌다. 금속 관련 조합의 한 이사장은 “과거처럼 대기업들이 대놓고 납품단가 후려치기는 안 한다”며 “1차 협력사가 대기업을 대신해 총대를 메고 납품 단가를 깎는 게 최신 트렌드”라고 말했다. 금속탱크조합의 박지화 이사장은 “35년 동안 사업을 해왔지만 중소기업이 처한 환경은 바뀌지 않았다”며 “상황이 바뀌지 않는 한 상당수 중소기업들은 죽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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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수 김상운 한상준 장선희 기자